[ISSUE] 남양유업 사태로 드러난 ‘갑을사슬’
[ISSUE] 남양유업 사태로 드러난 ‘갑을사슬’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甲의 횡포 ‘乙死조약’ (을에 불리한 일방적 계약)


대기업 영업사원의 대리점주를 향한 폭언과 협박, 대기업 임원이 비행기 승무원에게 폭언과 폭행을 한 이른바 ‘라면 상무’, 호텔 주차관리원을 장지갑으로 폭행한 ‘빵 사장’, 본사의 물량 밀어내기와 빚 독촉에 따른 고통으로 자살한 배상면주가 점주…. 이른바 ‘갑’의 횡포에 대한 사회적 공분이 들끓고 있다.

이미 ‘갑을 문화’는 한국사회에서는 흔하고 고착화된 문화다. ‘더 가진 자’와 ‘덜 가진 자’의 어쩔 수 없는 계약상의 불균형도 어느 사회에서나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는 이런 물질적 불균형이 인격적 불균형으로 이어지면서 최근의 극단적인 갑을 관계의 병폐로 드러났다는 데 문제가 있다.

전문가들은 불공정한 갑을 관계가 우리 사회에 구조적으로 고착화 돼 있어 이를 시정하지 않고서는 시장 발전·유지가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대기업의 불공정 행위 ‘위험수위’
자동차·제과 대리점, 백화점 입점업체 등 ‘약탈적 갑을문화’

지난 5월 3일 인터넷에 음성파일 하나가 공개됐다. 2분45초짜리 분량의 녹취록에는 분유업계 1위인 남양유업의 30대 영업사원이 50대 대리점 주인에게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내용이 담겨 있었다. 영업사원은 “물건 못 들어간다는 소리 하지 말고 당신이 책임지라”며 반말은 물론 욕설까지 퍼부었다.

이에 남양유업은 이튿날 홈페이지를 통해 대표이사 이름으로 사과문을 올리고 “녹취록은 3년 전에 발생한 문제로, 해당 영업사원은 즉각 사표수리를 했다”고 밝혔지만 녹취록이 공개되면서 이른바 을의 갑의 횡포 폭로와 공분이 이어졌다. 그동안 만연하게 이뤄졌던 대기업의 밀어내기 수법 등의 불공정 행위가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다.

5월 7일 민주당 이종걸 의원 등이 국회 귀빈식당에서 연 ‘재벌·대기업의 불공정·횡포 피해사례 발표회’에서는 ‘을의 성토대회’가 이어졌다. 한 점주는 “자식뻘인 영업담당에게 욕설과 협박, 갈취에 시달렸다”며 “후유증으로 정신병원에서 공황장애라는 진단을 받았다”고 털어놨다.

본사 직원들이 노골적으로 금품을 요구했다는 증언도 잇따랐다. 한 대리점 운영자는 “‘밀어내기’로 손실을 본 것도 문제지만, 명절 때마다 떡값과 지점회식비 등 각종 명목의 돈을 요구하기도 했다”며 “그때 그만뒀어야 하는데 후회하고 있다”고 증언했다.

남양유업 이외 다른 대기업에 대한 문제제기도 이어졌다. 매월 특약점에 매출 목표를 강제로 부과한 뒤 매출 목표를 채우지 못하면 판매 장려금의 50%만 지급하는 회사도 있다는 주장이다.

이밖에도 CJ 대한통운의 경우 일부 지역에서 화물운송기사를 상대로 수수료 폭리를 취했다는 의혹이 제기됐고, 크라운베이커리는 주문 제도의 일방적 변경으로 가맹점에 손해를 끼쳤다는 주장이 나왔다. 매출 목표를 정해주고 못 채우면 불이익을 주고, 유통기간이 다 돼가는 제품을 떠안기는 경우도 허다했다.

남양유업 사태는 식품업체뿐만 아니라 자동차 대리점, 제과 대리점, 백화점 입점업체 등 업종을 가리지 않고 약탈적 갑을문화가 만연해 있음을 여실히 드러냈다. 모임을 주선한 민주당 이종걸 의원은 “상당수 중소자영업자들이 대기업 본사의 수익보장 허위광고로 일을 시작했다가 매일 죽지 못해 사는 삶을 살고 있다”고 요약했다.

‘갑’의 밀어내기 횡포… 벼랑 끝 ‘을’ 죽음으로
속속 드러나는 갑을문화 폐해… 근본적 해결 필요

갑을 관계의 비뚤어진 문화는 본사-점주 등 거래 행위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적으로 만연한 부당거래의 민낯을 드러냈다.

지난 4월 15일 포스코에너지 임원 A씨는 대한항공 여객기 비즈니스석에 탑승해 라면 등 기내 서비스를 문제 삼아 여승무원을 폭행해 물의를 빚었다. 그는 현재 사직했으며, 이 사건은 포스코 라면 사건으로 유명세를 치렀다. 이어 9일 뒤인 4월 24일에는 ‘빵회장 손찌검 사건’이 발생했다.

프라임베이커리의 강수태 회장은 롯데호텔 주차장에서 자신의 고급 외제승용차를 빼달라고 채근하는 50대 호텔 지배인에게 약 15분 동안 욕설을 퍼부은 후, 장지갑으로 뺨을 후려쳐 만만치 않은 파장을 일으켰다.

한동안 잠잠해지는 듯 했던 갑의 횡포는 5월 3일 남양유업 사태로 일파만파 확산됐고, 열흘 뒤인 14일에는 전통주 제조업체 배상면주가의 인천 부평구 대리점주 이모씨(44)가 본사의 밀어내기 식 제품 떠넘기기와 빚 독촉에 따른 고통을 호소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씨는 대리점을 운영하며 빚이 누적된 데다, 최근 본사로부터 판매 압박과 채권 회수 압력을 받아 ‘죽고 싶다’는 말을 자주 한 것으로 전해졌다. 사건 당일 밀어내기를 한 적이 없다고 밝혔던 배상면주가는 이틀 뒤인 16일에서야 ‘밀어내기(강매)’ 의혹을 시인했다.


이 같이 갑을 관계 문제가 잇따르자 남양유업 등 기업들은 갑을 관계 근절을 내세우며 자정 활동에 나서는 모습이다.

현대자동차그룹 계열사는 경영진이 1·2차 협력사를 직접 찾아가 경영상 애로사항을 듣고 해결 방안을 지원할 계획이다. CJ제일제당은 협력업체 모임인 CJ파트너스클럽 지원을 확대해 김철하 대표이사가 협력업체운영지원단 총괄고문을 맡고 지원단 인원도 5명에서 10명으로 늘린다.

김 대표는 지난 14일 협력사를 직접 찾아가 애로사항을 듣고 상생협력과 동반성장 방안을 논의했다. 빙그레는 이건영 대표이사가 최근 사내 인트라넷에 글을 올려 윤리경영을 강조했다.

특히 협력업체와 대리점에 대한 불공정 거래행위를 비롯해 재판매와 가격 유지행위에 대해 일벌백계한다는 방침을 새로 세웠다. 표준근로계약서에서 사업주와 근로자를 가리키는 ‘갑’과 ‘을’의 단어도 사라질 예정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이 같은 기업의 자정적 개선 노력과 함께 정부의 강력한 불공정 거래 처벌 의지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포스코에너지, 프라임베이커리, 남양유업 사태로 불거진 갑을 관계 논란은 힘 있는 자가 약자와 불공정 계약을 통해 이익을 얻어내는 우리 사회의 불편한 단면을 보여주는 자화상인 만큼 강력한 법과 제도로 규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송원 인천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사무처장은 “남양유업과 배상면주가 사태는 밀어내기의 공통적인 관행이 곪아터져 나온 것인데 공정거래위원회가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해 대리점주와 본사 간의 불공정 계약이 이뤄지도록 묵인해 왔다”며 “우리 사회에 전방위적으로 만연한 본사 중심의 불공정 거래를 공정 거래 질서차원으로 바로 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정치권·시민단체 등 “갑을 문제 해결해야” 한목소리
약자-강자 관계 아닌 수평적 협력문화 시급

정치권과 시민사회 등에서는 한목소리로 갑의 횡포에 칼을 꺼내들며 입법을 서두르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5월 16일 오후 중소기업인들과 가진 청와대 만찬에서 “최근 본사의 밀어내기 압박에 시달린 대리점주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불행한 일이 있었다”며 유통업체의 대리점에 대한 ‘밀어내기(강매)’와 관련, “우리 사회에서 불공정거래를 근절하고 공정한 시장경제 원칙을 바로 세우고자 하는 새 정부에서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일”이라고 말했다.

맨 먼저 나선 건 민주당이다. 민주당은 5월 13일 ‘을(乙)을 위한 정당’을 선언했다. 우리 사회의 잘못된 갑을 문화 개선을 위한 ‘을(乙)지키기 경제민주화추진위원회’(이하 추진위)를 창립해 첫 회의를 열고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민주당은 정무위 소속인 이종걸 의원과 민병두 의원을 중심으로 공정거래법의 개정이 아닌 새로운 법을 제정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새누리당 경제민주화실천모임(경실모·대표 남경필 의원)은 다음 날인 14일 국회에서  ‘대기업-영업점 불공정 거래 근절 정책간담회’를 열어 불공정한 갑을관계 해결방안을 모색했다.

경실모는 이 자리에서 내부 고발자 보호 및 보상 강화 등 5대 개선사항을 반영해 공정거래법을 개정키로 의견을 모았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과 참여연대는 대리점·특약점 등 가맹점 형태가 아닌 판매조직을 보호하는 ‘판매조직 공정화에 관한 법률’을 입법 청원하기로 했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왜곡된 계약관계를 재점검하고 사회적 합의를 이뤄낼 수 있는 틀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참여연대 민생경제팀 최인숙 선임강사는 “자본주의는 무수히 많은 계약이 존자하며 여기에는 법적으로 평등해야 하지만, 왜곡된 계약관계가 여실히 드러난 만큼 사회적 합의를 이뤄낼 수 있는 틀이 필요하다”며 “공정한 계약과 갑을의 위치적 약자-강자 관계가 아닌 수평적인 관계의 계약이 자리 잡지 않으면 지속적인 시장발전, 경제발전을 이룰 수 없다”고 말했다.

우리 사회의 부끄러운 민낯을 드러낸 갑을관계가 이번 사태를 계기로 척결될 수 있을지 주목된다.

글 _ 정자연 기자 jjy84@kyeonggi.com 사진 _ 장용준 기자 jyjun@kyeonggi.com·연합뉴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연예 24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