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남 춘궁동 일원 ‘한성백제 왕성지’ 베일 벗다
하남 춘궁동 일원 ‘한성백제 왕성지’ 베일 벗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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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백제 도읍지 추정 유물·유적… ‘지붕없는 박물관’

서울 풍납ㆍ몽촌토성과 초기백제(위례성ㆍ한성백제시대)의 왕성지(王城址)으로 추정되는 하남시 춘궁동 일원이 수도권 제3신도시, 교산지구(649만㎡)에 포함되자 학계와 시민단체 등에서 문화재 유실 등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에 본보는 춘궁동과 주변에 분포돼 유구와 유물, 고증사료 등을 토대로 위례성시대(BC 18년~AD 475년) 왕성지를 재구성했다. 특히 춘궁동 초입에 우뚝 서 있는 국가사적 제422호 이성산성이 당시 ‘어떤 역할을 했을까’ 분석해 본다.

■ 출토된 유구ㆍ유물에 비춰 춘궁동 일원이 위례성인 근거
춘궁ㆍ교산동 일대에서는 최근까지 초기백제 도읍지로 추정될만한 유물과 유적지 등이 적잖이 발굴됐다.

먼저 동쪽에 남한산성과 검단산이 있고 서쪽에 이성산성, 남ㆍ북쪽에 한강과 비옥한 평야 등이 펼쳐져 있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20여년 전 검단산 정상 부근에선 고구려 시조인 동명성왕에 제(祭)를 지냈던 제단이 발견됐다.

이보다 앞서 당시 도읍지 방어시설로 추정되는 이성산성 정상에서 천단(天壇)과 지단(地壇)으로 여겨지는 8ㆍ9각 건물지가 한양대 박물관팀에 의해 발굴됐다.게다가 백제에 불교가 들어온 건 제15대 침류왕 원년(384년)이다.

춘궁동(상사창동)에 초기백제때 지어진 천왕사지(天王寺址)가 자리하고 있다. 천왕사는 조선시대까지 사용해 왔다는 게 사료를 통해 확인됐으며 규모 면에서도 3만~6만㎡에 이르는 큰 사찰이다. 특히 이 사찰(터)에서 사용한 구멍이 뚫린 사리공, 대형 석재(가로160cmㆍ세로140㎝)도 발견됐다.

백제 불교가 왕실불교로 정착됐다는 점에 대해선 부정하는 이들이 거의 없다. 당시 고대 국가의 틀과 3만~6만㎡ 규모의 천왕사 건물 크기에 비춰 바로 이곳이 도읍지라고 뒷받침하기에 충분하다.

게다가 지난해 4월 춘궁동에서 4~5km 떨어진 감일지구 조성사업 과정에서 4세기 중반~5세기 초반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백제 횡혈식 석실분 52기가 무더기 발견됐다. 횡혈식 석실분은 백제를 대표하는 무덤 양식으로 서울 인근에서 이처럼 많이 출토된 것은 처음이다. 직사각형으로 땅을 파서 바닥을 다진 뒤 길쭉하고 평평한 돌을 차곡차곡 쌓고 한쪽에 무덤방에 드나들 길을 만든 구조다.

이 고분들은 한성도읍기 백제 왕릉급 무덤으로 보는 서울 송파구 석촌동과 가락동, 그리고 방이동 일대 고분군이 도시개발로 대부분 파괴된 상황에서 당시 백제 건축 문화와 생활상, 국제 교류 양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부장품으로는 풍납토성에서 나오는 토기와 매우 흡사한 직구광견호(直口廣肩壺)를 비롯해 중국에서 제작된 청자 계수호(鷄首壺)와 부뚜막형 토기 2점이 출토됐다. 화려한 부장품으로 미뤄 보아 최고위층 무덤인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까지 전국에서 확인된 백제 횡혈식 석실분은 70여 기. 한 곳에서 50기에 달하는 한성시대 석실분이 나온 것은 극히 이례적이다.

■ 사료 등을 통해 춘궁동 일원이 위례성인 근거
다산 정약용 선생과 이병도 박사 등은 춘궁동 일원을 백제의 왕궁터로 확신했다.

또 하남 원주민 사이에서는 지금도 춘궁동 일원을 ‘궁안(궁터)’ 또는 ‘궁말’로 불리고 있다. 왕궁의 곡식 등을 저장하던 창고와 연관된 명칭, 사창동(司倉洞)도 현재까지 법정동으로 사용하고 있다.

왕궁 주위로 관청이 즐비한 골목을 뜻하는 한자인 ‘항(巷)’자가 들어간 명칭, 항동 역시 지금도 법정동으로 쓰고 있다. ‘삼국사기’ 백제 도미부인 설화와 관련, 장소 역시 서울 강동구나 송파가 아닌 하남시 창우리 근처일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

하남 사람들은 지금도 하남을 통과하는 한강을 도미강이라고 불렀고 실제로 조선시대까지 도미원이나 도미나루 등이 있었던 사실이 확인됐다. 게다가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기록된 백제 건국신화에는 위례성의 위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나열하고 있다.

백제의 시조 온조와 비류가 남쪽으로 내려와 한강유역에 도읍을 정할 때 한산(漢山ㆍ남한산)에 올라 본 10명의 신하들은 미추홀(인천)로 향하려는 비류에게 이렇게 간언했다. “북으로는 한수를 끼고 동으로는 산으로 둘러싸였으며 남으로는 비옥한 땅이 펼쳐져 있는데다 서쪽으로는 바다로 막혀 있습니다. 천연의 요새로 된 좋은 땅을 다시 얻기 어려우니 이곳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온조는 신하들의 간언에 따라 위례성에 도읍을 정했고 이 말을 듣지 않은 비류는 백성을 나눠 미추홀에 정착했지만 얼마 가지 못했다. 이 모두 하남시 춘궁동 일대에서 만날 수 있는 특별한 마을이름으로 씨줄과 날줄로 엮으면 거대하고도 웅장한 왕궁이 눈앞에 우뚝 선다.

■ 위례성(왕성)과 이성산성의 위치와 역할
기원전 18년 위례성에 도읍을 정한 온조왕은 끊임없이 침략해오는 동쪽의 낙랑과 북쪽의 고구려, 말갈 등에 대비, 고대국가의 기틀을 세워 499년의 역사를 열었다. 이런 역사의 한복판에 이성산성이 있다.

이성산성은 위례성 방어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왕성(춘궁동) 초입에 우뚝 서 있는 이성산성 정상에 올라서면 왜 이곳이 군사요충지인지를 단번에 느낄 수 있다.

맞은편 바로 앞에는 또 다른 토성, 291m의 객산(客山)이 눈을 부라리며 왕성을 호위하는 형세다. 서북쪽으로는 아차산과 한강이 한눈에 들어오고 동남쪽으로는 들녘이 코앞에 와 닿는다.

이성산은 위례성을 3면으로 둘러싼 청량산 서쪽 끝자락에 위치, 동쪽으로 위례성 전역과 북쪽으로 한강 전체, 서쪽으로는 풍납ㆍ몽촌토성을 한눈에 굽어볼 수 있다.

둘레 길이 1천950m인 이성산성 축성(2차)에 사용된 돌은 화강암으로 일정한 크기에 옥수수알 모양으로 둥글게 다듬어 만들었다. 바깥면을 둥글게 다듬어 깎은 까닭은 외형상 아름다움보다 적군이 성벽을 타고 오르거나 지렛대 등으로 무너뜨리기 어렵게 하기 위한 것으로 짐작된다.

특히 이성산성은 위례성을 침략하는 적과의 대규모 전투에서 최후 방어지휘부 역할을 담당한 만큼 포위돼 공격받아도 가장 마지막까지 함락되지 않고 견뎌야 했다. 이를 위해선 성 안에서 식수를 조달할 수 있는 우물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지난 1986년부터 2016년까지 13차례에 걸친 발굴조사에서 저수지 3곳이 발굴됐다.

이런 상황을 종합하면 이성산성은 당시 왕도, 즉 위례성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 현재의 방위사령부 역할을 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성산 정상에는 초기 백제의 제단 흔적이 또렷이 남아 있다.

정상에서 8각(2차 발굴)과 9각(1차 발굴) 형태의 건물지가 지난 1986~87년 연이어 발굴됐다. 당시 이들 건물지에선 각각 길이 10.3m와 8.8m 대형 초석들이 원래의 배열을 유지한 채 남아있다.

학계는 이같은 8~9각 건물이 건축역사상 보고된 바 없는 독특하고 화려한 형태로 규모나 구조 등으로 미뤄 종교적인 의식에 사용됐던 제단일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9각 건물지는 해가 떠오르는 동쪽 가장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어 하늘에 제를 지내던 천단(天壇), 이성산 정상 중앙부의 8각 건물지는 방위개념에서 중앙을 뜻하는 ‘토(土)’에 위치에 지신(地神)에 제를 올리던 사직단(社稷壇)이었다는 게 학계의 분석이다.

더욱이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고이왕(제8대) 10년 정월 큰 단을 만들고 천지산천에 제를 올렸고 근초고왕(제13대) 2년 1월 천지신에 제사를 올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백제본기에는 온조왕이 백제를 건국한 원년(BC 18년) 동명묘를 세웠다는 사실이 명확하게 기록됐으며 이후 나라에 우환이나 왕이 등극한 정월에 왕이 직접 제를 올렸다는 기록이 8차례나 등장한다.

하남=강영호기자
 

▲ 김상호 하남시장인터뷰1

[인터뷰] 김상호 하남시장
춘궁동 일원 발굴작업 눈앞 백제문화의 寶庫 개봉 기대

-춘궁동 일원을 위례성ㆍ한성시대의 왕성지로 보는 이유는.
초기백제는 하남시 일원과 지금의 서울을 중심으로 온조왕 때부터 수도로 삼았고 개로왕 때 고구려 장수왕에게 정복된 후 한때 남평양으로도 불렸다. 게다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신문왕 때 9주5소경의 하나인 한산주(漢山州)로 불리기도 했다. 이 일대에서 백제ㆍ고구려ㆍ통일신라시대의 유구와 유물 등이 혼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딱히 ‘이게 맞다 저게 맞다’는 식은 논란에 불씨를 지피는 격이다.

또 일부 학계에서는 초기 백제의 왕성지를 몽촌ㆍ풍납토성 일원으로 보는 시각이 적지 않다. 그러나 고대국가의 틀도 안잡힌 2000여년 전 치수시설도 마련되지 않는 한강 모래밭에다 왕이 주둔하는 성을 쌓았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더욱이 풍납토성은 20여년 아파트 공사하면서 발굴됐다ㆍ당시 발굴과정에서 패총(貝塚)도 발견된 것으로 알고 있다. 왕이 주둔하는 곳에 쓰레기 무덤이 발견됐다는 것이 역설적으로 왕성지가 아님을 스스로 자인 꼴이다. 현재에도 4대문을 비롯해 서울 전역의 쓰레기는 경기(서울 변두리)에 있지 않은가. 춘궁동 일원의 보상이 끝나면 택지개발에 앞서 발굴에 착수한다. 학계를 뒤흔들 어떤 유구와 유물이 쏟아져 나올지 아무도 모른다. 향후 발굴과정을 지켜보자.

-교산지구 개발에 따른 향후 문화재보호 대책은.
시는 교산지구에서 이루어진 기존의 발굴조사 성과를 면밀 검토는 물론 관련 민속자료도 수집을 추진하는 등 문화유산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현재 LH에서 추진 중인 ‘하남 교산 역사문화자원의 창의적 활용방안 연구’ 용역의 결과와 지표조사 및 발굴조사 결과가 추가되면 관리계획을 구체적으로 마련할 계획이다. 인근 감일지구 한성백제 역사유적공원ㆍ박물관보다 보다 큰 그림을 그려보려고 한다.

하남=강영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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